빅토리티비
최근 향초를 켜는 즐거움에 빠져 곧잘 초를 켜놓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이 선언했다. “향초 냄새가 싫어 엄마…. ” 라는 것은 내가 트로트 음악과 색소폰 소리를 못견뎌하는데 남편은 그 두 장르를 좋아하는 관계와도 같은 것?그러고보니 향기도 음악도 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분리 추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음악의 경우라면 소리를 뽑아 귀에 집어넣는 방식이 이미 오래전부터 발명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어폰을 끼고 듣는 것보다 집안 가득가득 소리가 퍼지도록 듣고 싶을 때가 있는 법. 그래도 어찌어찌 타협할 수는 있겠지만 ‘냄새’ 혹은 ‘향기’라는 장르는 따로 뽑아 자신의 코에만 입력하는 기술이 아직도 요원하다. 그리고 그 어떤 과학자도 그런 계통으로는 연구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시큰둥하게 여긴다는 것은 마음의 섭섭함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음이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향초와 트로트의 관계식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으로 된 곰인형을 너무도 좋아하는 딸아이가 인형을 싫어하는 나에게 자꾸 안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 그나저나 왜 색소폰 소리가 싫은가? 곰곰 생각해보면 색소폰은 언제나 끈적한 블루스의 악기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땀으로 끈적이는 불륜의 현장 같은 이미지를 안겨준다. 색소폰 소리는 덥고, 여름 밤의 색소폰 소리는 더욱 견기디 어렵다. 이렇듯 내 ‘싫은 소리’의 범주가 결정되는 요인은 그야말로 뜬금 없어서 예를 들면 오후의 스포츠 중계 소리를 못 견뎌했다. 그런 식, 명확하게 이유를 대지도 못한다. 그 견딜 수 없는 나른함, 누군가가 공을 치고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뛰고 어느 편의 점수가 오르고 하는 지리멸렬함을 때로 (그리고 자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휴일 오후의 스포츠 중계(주로 야구 가끔 배구나 농구 혹은 복싱 타이틀 매치 같은)가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내 귀에 끝없이 찰싹거리며 닿고, 그것을 바라보던 더 이상 젊지만은 않은 내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향한 채 졸고 있던 그 나른한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풍경이기에. 뜬금없는 뉴욕양키스 ;; 훈련을 하면 색소폰 소리가 좀 좋아질까? 아주 멋진 색소폰 연주를 아직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자신의 곰인형에 얼굴을 부비는 나의 모습을 보면 딸이 무척 좋아할텐데, 숨이 잘 안쉬어지는 걸 참고 어느 날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나를 아이가 보면 향초를 켜는 엄마를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으려나. 아이가 아이돌 그룹같은 걸 노골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럽다. 선천적으로(?) 연예인에는 한방울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아이가 연예인이 좋다고 덕후를 선언한다면 너무 낯설 것 같아서.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We bare bears’ 라는 애니메이션 곰돌이들과 집에 있는 곰돌이들이 최고인 중딩이라, 천만다행이야. 그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이 너무 고맙단다, 그런 예쁜 곰돌이들을 만들어줘서 :) Ice bear 🙂 견딜 수 없던 그 소리들과 감촉들이, 그리고 그것을 못견뎌하던 시간마저 어느 순간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건 시간이 가져다주는 혜택이라고 하면 되려나. 아니면, 농담 쯤 되는 걸까. 갑자기 휴일 오후의 스포츠 중계가 듣고 싶어진다. 지금은 즐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초를 켜고 싶은 마음을 꾸욱 참고. 특정 향기를 혼자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 추출 노우즈폰 같은 건 정말 안나오려나?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