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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

사람 마음이 다 똑같습니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고,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한정된 재화에 비해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을 포기하고 양보할 줄 아는 것, 아니면 서로 함께 나눠쓰는 것, 그것이 지속적인 공존을 위해 행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그것이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마땅한 역할인 것이지요. ​한편,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죠? 일단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고 봐요. 저의 사람 및 상황에 대한 인식 방법이라고 하는데요, ‘최악’을 염두에 둬요. 사람이든, 상황이든…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누구든 변할 수 있다고, 때로는 등에 칼도 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상황도 가장 나쁜 것을 가정한다는 겁니다. 그 지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받으려는 생각과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줘버려요.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 없이… 사랑하고, 베푼 그것들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실망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다 보니, 나름 여러 상황 속에서도 대처가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으니, 뜻하지 않았던 은혜를 받으면 감사할 일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최악을 가정하면, 그래봤자 닥치는 것은 예상했던 일일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오히려 가정했던 것보다는 늘 상황이 좋을 수밖에 없으니(최악을 가정했으므로…), 감사할 일만 남을 수밖에요. 이것이 저의 삶의 방식, 마주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아내, 사라가 죽습니다. 수명을 다하고 죽어요. 당연히 슬펐을 겁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다시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큰 슬픔입니다. 모든 이별은 가슴이 아프지요.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고요, 관계의 긴밀성과 친밀함이 클수록, 아픔은 더욱 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재회한다는 것은 알지만, 이 땅에서의 슬픔은 당연한 것이지요. 오히려 크게 슬퍼하는 것이 맞는다고 봐요. 슬픔의 크기는 관계의 긴밀성을 증명합니다. ​암튼,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매장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그 당시 그 지역을 점하고 있었던 헷 족속에게 땅을 구하죠. 그때, 대표격인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구하려고 하는 막벨라 굴의 소유자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나섭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호의적으로 대응합니다. 공짜로 줄 테니 쓰라고요. 아내 사라를 매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랬을 때 아브라함은 한사코 값을 치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브론도 고집을 피웁니다. 그냥 주겠다고요. 그런데, 그가 이런 표현을 쓰더군요. 출애굽기 29장15절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리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자,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땅값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땅값이 얼마인지 이야기를 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가 실은 받고 싶었던 것이겠죠? 왜냐하면,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는 거예요. 거저 베푸는 것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래서 흘렸던 겁니다. 넌지시…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말이지요. ‘은 사백 세겔이나 돼. 하지만 그냥 써’라는 말은 ‘은 사백 세겔은 받아야지. 알아서 값을 쳐주셔’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 의도를 간파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미리 정당한 대가를 주고, 소유권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 사라의 매장지가 결국 이스라엘의 땅이 되는 것이잖아요? 다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이고 인도하심이겠지요. ​사람은, 사람입니다. 헛된 기대를 갖는 것보다 사람이라는 한계,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믿음보다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지혜롭게 접근하고, 또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