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에도 트렌드가 있다. ‘경향’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넓게 본다면 어떤 ‘흐름’이라고 읽어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 2016년 전후(이 시기를 딱 찝어서 특정하는 건 국내에서 여성 서사 영화가 가장 두드러진 약진을 보였던 해이기 때문이다)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소위 여성 서사라 할 수 있다. 과거 남성 주도적 서사에서 손쉽게 소모되었던 여성 캐릭터들이 마치 닥터 차정숙의 반란처럼 이제 여성 서사도 먹히고 돈이 되는 하나의 장르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퀸메이커>를 봐도 그렇다. 이는 달라진 여성 서사의 위상을 대변한다.결과적으로 분명 반길 만하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어떤 일이 아주 뒤늦게 실현된 감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여성 서사는 무조건 반길 만한 어떤 것인가? 그동안 개인적으로 영화 관련글을 주로 썼지만 예외적으로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여성 서사가 가지고 있는 명과 암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는 <닥터 차정숙>이 여성 서사를 위해 어떤 프레임 위에 이야기의 뼈대를 세웠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정숙(엄정화)은 이름처럼 결혼 후 20년을 가정주부로서 조신하고도 정숙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이미 방송된 1,2회 내용만을 토대로 이야기해보자면, 앞길이 전도유망하던 의대생이 하룻밤 실수(내지 순간의 선택)로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대전환기를 맞는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인생 루트를 급선회하게 된 정숙은 과거 어린 첫째 아들의 뜻하지 않은 사고로 레지던트의 길을 결국 포기하기에 이른다.그녀에게는 현재 전공의 1년차인 장성한 첫 째 아들과 아빠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의대 진학이 아닌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인 둘째 딸이 있다. 소위 스스로 품위 있는 인물임을 자처하며 잘 나가는 대학병원 항문외과 과장인 인호(김병철)를 남편으로 두고 있기도 하다. 이들 부부와 자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인호의 어머니(박준금)는 있는 집 사모님의 전형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지만 시청자들에게 인호와 인호의 어머니는 이미 정숙이라는 캐릭터의 반대축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라는 무언의 암시가 내재한다. 인호는 승희(명세빈)라는, 정숙의 예과 동기이자 첫사랑을 두고 정숙과의 하룻밤 스캔들로 졸지에 결혼을 하게 된 파렴치범에 가깝다. 그래도 책임을 졌다는 점에서 그가 영 나쁜 남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자그만치 승희와 그렇고 그런 내연관계를 이어가는 간 큰 남자라는 점이다. 그러니 정숙이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과 승희가 함께 일하는 병원의 레지던트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할 때 인호는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더라도 정숙의 대반란을 위한 나머지 캐릭터들의 포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유추해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요즘 MZ세대들의 결혼관을 잠시 끌어와보자. MZ세대들에게 여성의 안정된 직업과 그로 인해 창출되는 경제력은 여성의 외모 만큼이나 큰 의미를 지닌다. 요즘 젊은 남성 세대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예쁘고, 돈도 잘 벌고, 똑똑하고, 건강한 애도 낳아주고, 집안일도 잘 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자신의 부모님께도 잘 하길 원한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미 자식들이 장성했고 의사라는 전문적 커리어를 구축할 수 있는 정숙이라는 인물의 장점을 포기하게 할 만큼의 치명적인 약점을 인호라는 캐릭터에 부과해야만 (요즘 젊은 MZ세대 남성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인호가 자신이 내세우는 품위에 어긋나는 이중생활을 하면 할수록 시청자들 입장에선 정숙의 반란을 심증적으로 어떻게든 이해하고 응원하고 싶어지는 동력이 마련된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 가지는 전형에서 인호도, 그의 어머니도 자유롭지 못하다. 즉, 전형적인 선악 프레임에서 이들 인물들의 관계 역시 꽤나 도식적이다. 그렇다면 승희 캐릭터(1,2회에선 병원을 여러채 소유한 부잣집 딸에 잘 나가는 의사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녀에 대한 충분한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는 차지해두고서 로이. 킴이라는 인물은 이 여성 서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그는 미국 입양아 출신이지만 한 마디로 그것 빼곤 다 가진 완벽남에 가깝다. 정숙이 인호나 그녀의 가정 내 위치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그녀의 반란엔 설득력이 부여되고 그런 그녀를 구원해줄 것 같은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고전적 로맨스의 틀에서 <닥터 차정숙>은 단 한 발짝도 진일보하지 않았다. 현실에 로이 킴 같은 의사가 진짜 있는가?우스갯소리로 내 남편이 그런다. 그런 사람은 뮤지컬 무대나 드라마나 영화 또는 패션계 혹은 모델 업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이다. 정숙과 로이 킴 사이의 숱한 우연은 두 사람을 어떻게든 잇는데 남자가 필요하고 남자 중에서도 외모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썩 괜찮은’ 남자가 필요하다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강박들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친정엄마가 정숙을 생각해서 사다준 건강 식품은 하필이면 정숙이 간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할 만큼의 중증 급성간염 증세로 이어진다. 이또한 우연치고는 과한 우연이다.그래, 여기까지도 가능한 설정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건강기능식품이 간과 신장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근데 인턴 생활을 한 정숙이 그 정도의 의학 상식도 없었을까 생각하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우연이다.그런데 하필이면 정숙의 간 이식을 집도해줄 주치의가 로이 킴이고 그들은 놀랍게도 그 대면이 처음이 아닌데, 버스에서 쓰러진 응급 환자를 구호하고 싶지만 장롱의사면허 탓에 구급차에 `동승만’ 하게 된 정숙 앞에 하필이면 대학병원 간담췌외과 과장인 로이 킴이 ‘짜잔’ 하고 등장하는 식이다. 그쯤에서 이들의 관계가 마무리되었다면 이해할 수도 있는 서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의사와 병원 외부 손님이 우연히 만나는 우연성을 두 사람은 놀랍도록 반복한다.결국 불륜과 삼각관계라는 큰 틀 안에서 이 드라마 속 모든 캐릭터들이 작동한다. 정숙-인호-승희, 인호-정숙-로이 킴. 이런 구도가 새삼스럽지 않게 반복된다는 것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자신의 삶에서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답에도 위배된다. 물론 끝에 정숙은 어떤 식으로든 끊어졌던 자신의 커리어를 다시 이을 것이고 인호는 정숙의 반란으로 맞은 위기를 어떻게든 봉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결국 로이 킴이나 승희는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도구 내지는 내면의 상처를 회복하고 성장하는 캐릭터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의 편한 해법은 그럴 듯한 주제의식과 여성 서사라는 힘을 빌려서 마치 세상 모든 정숙이들을 위한 것처럼 제시된다. 가장 비현실적인 것은 정숙이의 도전 자체가 현실에선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닥터 차정숙>이 영화